인지행동치료

“왜 나는 항상 내 감정을 후순위로 둘까?” CBT로 탐색하기

ad-jungsin 2025. 6. 16. 05:09

“왜 나는 항상 내 감정을 후순위로 둘까?” CBT로 탐색하기

1. 감정을 억누르는 나, 도대체 왜 그럴까요?

가끔은 너무 익숙해서 의심조차 들지 않는 나의 반응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불편한 말을 했을 때 속으로는 상처받았지만 겉으로는 “괜찮아”라고 말하며 웃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 힘든데도 “제가 할게요”라고 자청합니다.
그 순간의 반응은 무의식처럼 자동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조용한 공간에서야 비로소 감정이 밀려옵니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감정이 느껴지지도 않고, ‘나는 도대체 왜 이러지?’라는 공허한 질문만 남게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착해서가 아닙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사회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혹은 거절당할까 두려워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억누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반복적으로 내 감정을 뒤로 미루는 습관이 결국 나 자신과의 거리감을 만듭니다.
타인의 감정에만 민감하고, 나의 감정은 무시한 채 살아가게 되면 점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감각조차 희미해지게 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나의 ‘감정 패턴’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도구입니다.
인지행동치료(CBT)는 그 과정을 현실적으로 탐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심리학적 렌즈입니다.


2. 인지행동치료란 무엇인가요?

CBT는 단지 감정을 다스리는 기법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체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CBT는 인간의 심리를 ‘생각 – 감정 – 행동’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나눠 보고,
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탐색합니다.
특히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부정적인 사고가 감정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규명하는 데 집중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싫은 말을 하면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거야”라는 무의식적 사고가 있다면,
당연히 그 상황에서는 내 감정을 숨기고 상대를 맞추는 쪽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나는 소중하지 않다’는 신념이 더욱 강화되죠.
CBT는 이러한 왜곡된 사고를 인식하고, 그것을 다른 시각으로 바꾸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CBT는 실제로 사고 기록지와 대화 스크립트, 실전 행동실험 등을 통해 ‘나를 보호하면서도 표현하는 방법’을 훈련합니다.
즉, 감정 억압을 벗어나는 길은 감정을 인정하고, 사고를 교정하며, 건강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연습이 필요한 과정입니다.


3. 나는 왜 내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까?

이 질문의 답은 어쩌면 아주 어릴 적 기억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CBT에서는 반복적인 감정 억압 뒤에 숨어 있는 핵심 신념(core belief) 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핵심 신념은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으로, 대부분 무의식 속에 숨어 있으며,
“나는 부족하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나는 남들보다 덜 중요하다” 같은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러한 신념은 대부분 특정 사건이나 반복된 환경에서 형성됩니다.
어린 시절 “너는 너무 예민해”, “그 정도는 참아야지”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사람이라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문제적’이라고 배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는 부모님이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경우,
감정 표현 자체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만든 ‘내면의 룰’에 따라 살아가고, 그 룰이 감정을 억누르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CBT는 이 신념을 ‘사실’이 아니라 ‘생각’으로 분리해서 바라보도록 도와주며,
그 신념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탐색합니다.
결국 자기감정을 후순위로 두는 것은 나의 본성이 아니라 학습된 반응일 수 있습니다.


4.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나에게 주는 ‘보상’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을 억누르는 데는 보상이 있습니다.
그 보상은 당장의 평화, 타인의 인정, ‘착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이미지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갈등을 피함으로써 순간의 불편함은 사라지지만, 장기적으로는 내면의 불편함이 쌓이게 됩니다.
이런 패턴이 지속되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오히려 익숙하고 안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부당한 평가를 받았지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 때,
당장은 상사와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아 안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존감 하락, 분노 누적, 피로감 등의 형태로 내면에 쌓이게 됩니다.
결국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유익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정서적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심리적 대가를 요구하게 됩니다.

CBT에서는 이러한 숨겨진 보상을 인식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정리하게 합니다.
단지 감정을 억누르지 말라는 권유가 아니라,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했을 때 생기는 새로운 보상,
즉 자존감 상승, 관계의 진정성 확보, 내면의 평화 등을 경험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합니다.


5. 자동적 사고: 내 안의 무의식적 판단

감정을 억누르는 행동은 무의식적인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을 CBT에서는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 라고 부릅니다.
자동적 사고는 특정 자극에 대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으로, 대부분 빠르고 강력하며 자각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말하면 상대가 실망할 거야”, “내가 참는 게 낫지”, “이런 건 예민한 거니까 넘기자” 같은 문장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자주 반복되며 점점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 결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스스로 차단하게 되고,
결국 자기검열과 억압이 일상이 되어 버립니다.
더 나아가 이 사고들은 실제 감정보다는 ‘두려움’과 ‘가정’에 기반을 둡니다.
즉, 감정을 표현하면 벌어질지도 모를 부정적 결과를 앞서 예측하고, 그것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CBT에서는 이런 자동적 사고를 기록하고, 사고를 검토하는 연습을 합니다.
그 생각이 사실인지, 과장된 건 아닌지, 다른 해석은 가능한지 묻는 일련의 질문을 통해 사고를 유연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닌,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됩니다.


6.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실제로 삶에 미치는 영향

감정을 억누른다는 것은 단순히 말하지 않고 참는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억제된 감정은 우리 몸과 마음 곳곳에 소리 없이 침투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대표적인 예가 심리적 무감각입니다.
슬퍼야 할 상황에서도 눈물이 안 나오고, 기쁜 순간에도 벅차오르지 않는 상태.
이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생기는 정서적 마비(emotional numbness) 현상입니다.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고, 언젠가 반드시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감정 억압은 신체화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두통, 만성 피로, 위장 장애, 과민성 대장 증후군 같은 질환들은 종종 미처 표현되지 못한 감정의 부산물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정신건강 연구는 감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체 증상을 통해 감정을 표현한다는 ‘신체화 이론(somatization theory)’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은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겉으로는 다정하고 배려 깊어 보이지만, 진짜 자기 감정을 나누지 못하므로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고, 점차 관계에서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게 됩니다.
CBT에서는 이러한 감정 억압의 결과를 감정 일지, 사고 기록표, 신체 반응 추적기 등을 통해 추적하게 하며
억누른 감정이 어디에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돕습니다.


7. 감정을 우선순위에 두는 훈련, 어떻게 시작할까?

감정을 우선순위에 둔다는 것은 내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고, 존중하며,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감정 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CBT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단계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감정에 이름 붙이기입니다.
“나는 지금 불안해요”, “나는 지금 외롭습니다”, “조금 서운했어요”
이처럼 구체적이고 진솔한 감정 언어를 사용하는 연습이 첫걸음입니다.

이 훈련을 처음 시작할 때 가장 흔한 어려움은 감정을 잘 모르겠다는 느낌입니다.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조차 헷갈린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는 감정 단어 목록이나 감정 체크리스트를 활용해봅니다.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며,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이 스쳤는지 조용히 적어보는 것이죠.
CBT에서는 이를 감정 추적 훈련이라고 하며, 일종의 ‘감정 근육’을 키우는 과정으로 여깁니다.

이후에는 그 감정에 따른 행동을 구분하는 훈련으로 넘어갑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 침묵하는 것이 자동 반응이라면,
그 행동을 멈추고 “지금 나 조금 화났어요”라고 말해보는 연습을 해봅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고 풀어내는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감정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내가 나를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8. ‘아니요’라고 말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감정을 후순위에 두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니요”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가 실망하거나 나를 멀리할까봐 두렵기 때문에
늘 “응”, “그래”, “내가 할게”라고 말하며 자기 감정을 억제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내 감정은 묻히고, 타인의 기대와 감정만이 우선되는 삶이 됩니다.
이러한 관계 패턴은 단기적으로는 평화로워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상호 불균형한 관계, 자존감 저하, 정서적 탈진을 초래합니다.

CBT에서는 감정 표현의 핵심 중 하나로 건강한 경계(boundary) 설정을 강조합니다.
경계란 상대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과 에너지를 지키는 테두리입니다.
이를 위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구체적인 연습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좀 힘들어서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 이야기는 들으면서 제가 좀 불편했어요.”
이처럼 상대에게 솔직하게 말하되 공격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거절하는 스크립트를 연습합니다.

CBT 치료에서는 실제로 이런 대화를 시뮬레이션해보는 역할극(role-play) 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내 감정을 지키면서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익히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연습을 통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거절한다고 해서 관계가 깨지지 않고, 오히려 솔직함이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요.


9.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하는 걸 ‘이기적’이다, ‘유난스럽다’ 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집단과 조화, 타인을 배려하는 문화 속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이상한 사람’처럼 비춰질까 두려워서 더 조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감정을 바라보는 오래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CBT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하고 관계 중심적인 행위임을 강조합니다.

감정을 억누르며 ‘착한 사람’ 역할을 할수록
오히려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은 약해집니다.
진짜 관계란 서로의 내면을 공유하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숨긴다는 건 일종의 ‘거짓된 연결’에 머무는 것이고,
결국 그 관계는 피로와 불만만 남게 됩니다.

CBT는 ‘자기 중심적 감정 표현’이 아니라
공감과 조화를 전제로 한 감정 소통을 가르칩니다.
즉,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내 마음을 말하는 기술입니다.
“나는 지금 이런 감정이 들었어”라는 말은 이기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나와 상대를 더 가깝게 해주는 정서적 다리가 됩니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하고 책임 있는 관계의 첫걸음이 됩니다.


10. 나를 다시 우선순위로 두는 삶

지금까지 우리는 왜 감정을 억누르게 되는지, 그 이유와 배경, 영향과 대안을 CBT 관점에서 살펴봤습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할 때입니다.
“나는 나를 얼마나 존중하며 살고 있는가?”
감정을 후순위로 두는 삶은 결국 나 자신을 뒷전으로 두는 삶입니다.
하지만 인지행동치료는 말합니다.
그건 바꿀 수 있다고, 그리고 변화는 작고 현실적인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고요.

‘감정 기록하기’, ‘감정 이름 붙이기’, ‘건강한 거절 연습하기’,
이 모든 과정은 나를 우선순위에 두는 실질적인 전략입니다.
내 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그 감정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면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나만의 진짜 목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 훈련이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심리적 혁명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삶은,
더 이상 억눌러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자유롭게 흐르는 감정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내 감정을 후순위에서 꺼내
‘가장 앞자리’로 데려다주는 연습을 시작해보면 어떨까요?